[기고] 강화의 선사시대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강화 역사 관련 저서

《숙종, 강화를 품다》(2014)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2014)
《강화도史》(2016)
《연산 광해 강화》(2022)

《오군, 오군, 사아이거호-강화도에서 보는 정묘호란·병자호란》(2022)
《강화도, 근대를 품다》(2020)
《역사의 섬 강화도》(2002)


오늘은 강화의 선사시대를 살펴봅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을 남기게 된 이후부터를 역사시대라고 하고 문자 발명 이전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합니다. 선사(先史)는 역사 이전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까지를 선사시대로 분류합니다. 선사시대는 문자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 등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연환경도 고려합니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가 시작된 것은, 교과서 기준으로, 대략 70만년 전이고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만 년전쯤부터입니다. 만약 강화에서 3만 년 전에 만들어진 어떤 도구가 나왔다고 하면, 그건 구석기시대 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내가면 오상리, 양사면 교산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신석기시대 유물은 강화 본섬은 물론이고 석모도, 주문도 등 거의 전 지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를 썼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대개 ‘뗀석기’가 낯설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타제석기(打製石器)라고 배워서 그래요. 요즘은 교과서 속 한자 용어를 일부 한글로 바꿔서 씁니다. 그래서 타제석기가 뗀석기가 됐습니다. 널리 알려진 뗀석기가 주먹도끼입니다. 강화역사박물관에 강화에서 출토된 주먹도끼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습니다. 지능의 문제라기 보다는 기후 문제입니다. 워낙 추워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럼 뭘 먹고살아야 할까요. 주로 사냥입니다. 사냥감을 찾아 계속 이동해야 하는 삶이라 굳이 집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석기인들은 주로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동굴이 없는 지역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어차피 이동할 거니까 튼튼하게 잘 지을 필요가 없었겠죠. 그냥 대충 막 지었습니다. 구석기시대의 집을 ‘막집’이라고 합니다.


신석기시대에는 기후가 따듯해져서 농사가 시작됩니다. 이제 사람들은 한곳에 눌러앉아 살게 됩니다. 정착생활을 하려면 집을 제대로 지어야 합니다. 신석기시대 집은 ‘움집’입니다. ‘움’은 땅을 판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움집은 일종의 반지하 집 정도의 의미가 되겠네요. 이들은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인 간석기를 사용합니다. 간석기를 예전에는 마제석기(磨製石器)로 배웠었지요.


▲ 강화 출토 주먹도끼(강화역사박물관)
▲ 빗살무늬토기(강화역사박물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 빗살무늬토기입니다. 박물관 어디든 빗살무늬토기를 대부분 전시하고 있는데, 그렇게 온전한 모양의 토기가 출토될 수는 없습니다. 다 깨졌죠. 깨진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서 모양을 복원했거나 아니면 똑같이 만든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는겁니다. ‘빗살무늬토기’라고 이름 붙인 것은 빗살처럼 생긴 도구로 무늬를 새겼기 때문입니다. ‘빗살무늬’라는 특정한 무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강화에서도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많아 나왔습니다. 사람들 살기에 적합했다는 얘기겠지요.


이쯤하고 청동기시대로 넘어갑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시기를 기원전 10세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기원전 2000년쯤으로 배우고 가르칩니다. 청동은 합금(合金)입니다. 구리(동)에 주석 등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서 제조합니다. 만들기가 아주 힘든거라서 아무나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높은 사람만 청동기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그냥 석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청동기시대에도 농기구의 재료는 여전히 돌이었던 것입니다.


높은 사람만? 예 그렇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처음으로 ‘높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정치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지위에 차이가 없었던 평등사회로 봅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유재산 개념이 등장하고 빈부 격차가 생기게 됩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구분되는 계급사회가 성립된 것이지요.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탄생하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이 등장합니다. 고조선 이후의 나라들, 이를테면 부여나 고구려 등은 철기시대에 성립하게 됩니다. 철기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대략 기원전 5세기부터입니다.



청동기시대가 계급사회임을 알려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규모 큰 고인돌입니다. 죽은 이 한 사람을 위해 적어도 수백 명이 동원돼서 고인돌을 세웠으니, 그 고인돌에 안치된 이는 지배층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점면 강화역사박물관 앞에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인돌이 있습니다. 강화 사람들은 그냥 ‘부근리 고인돌’이라고 부르는데 국가지정 문화재(사적)로써 공식 이름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江華富近里支石墓)입니다. 덮개돌 무게가 무려 55톤! 대단합니다. 분명히 강화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강화에 이거 하나밖에 없는것 같은 착각까지 하게 합니다. 비록 크기는 작아도 ‘부근리 고인돌’ 만큼이나 값진 고인돌이 강화에 많습니다. 과거에는 대단히 많았겠지만, 오랜 세월 개발로 흩어지고 사라져서 지금은 160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 강화 부근리 지석묘

고인돌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의 글을 보면 저마다 강화 고인돌 개수를 다르게 적었습니다. 어떤 돌덩이를 A교수는 고인돌이라 하고, B교수는 아니라고 보기에 차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고인돌의 생김새 때문입니다.


고인돌은 그 생김새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탁자식, 기반식, 개석식! 탁자식은 받침돌이 높아서 탁자처럼 보이는 고인돌입니다. ‘부근리 고인돌’이 대표적이죠. 이런 고인돌은 누가 보아도 금방 고인돌인 걸 압니다. 주로 한반도 북쪽에 분포하기 때문에, 예전에는 ‘북방식’으로 불렸습니다.


기반식은 다른 말로 ‘바둑판식’이라고 합니다. 바둑판의 한자 표기가 기반(碁盤)입니다. 받침돌 높이가 아주 낮고 덮개돌이 두툼해서 그 모양이 바둑판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바둑판식, 또는 기반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로 한반도 남쪽에 분포해서 남방식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기반식 고인돌도 보면, 고인돌이네, 알 수 있습니다.


개석식 고인돌은 개석(蓋石), 즉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입니다. 받침돌 없이 덮개돌만 보이니까, 이게 고인돌인지 그냥 넓적하게 생긴 바윗덩이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인돌이라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하는 일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강화의 고인돌 절반 정도가 탁자식(북방식)이고 나머지 절반은 개석식입니다. 기반식(바둑판식, 남방식) 고인돌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지난 2000년, 강화 고인돌이 전북 고창, 전남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면 160기 내외의 강화 고인돌 모두 세계문화유산일까요? 아닙니다. 70기(또는 68기)만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신청 당시 명단으로 작성해서 올린 게 70기뿐이었다고 합니다. 강화 모든 고인돌의 학술적·경관적 가치를 따져서 신중하게 선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은 더 값지고 비지정 고인돌은 질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여기면
안 될 것입니다. 모두 소중한 강화의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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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