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마리산 참성단

 ▲ 이경수
   - 강화읍 출생, 거주
   - 전 양곡고등학교 역사 교사


“한번 보고 가득한 회포를 풀고 두 번 보고 천 년 역사를 알만한 강화! 우리가 원하여 보고자 하는 강화!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강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이가 잡지 《개벽》에 실은 글의 일부입니다. 가고 싶은 강화가 아니라 ‘기어코 가야만’ 하는 강화라고 했습니다. 가자봉인뿐만 아니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열망하는 이마다 ‘기어코’ 강화에 다녀갔습니다.


교통 불편하던 시절, 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강화를 찾았을까요. 참성단을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마리산 참성단에 오른 가자봉인은 그 감회를 이렇게 썼습니다. “단군이 등을 어루만지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감격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처지가 되어 찾아온 마리산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시조인 단군 품에 안겨 위로받았습니다. 독립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예까지 오기에 애썼구나. 걱정 말거라. 너희는 기필코 뜻을 이룰 게다. 내가 힘 되어 주마.’ 아마도, 가자봉인은 단군의 음성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 1920년 합일학교 정족산 마리산 수학여행(사진 제공 합일초등학교)

일제강점기에 참성단은 학생들 수학여행지로도 유명했습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정족산성)과 참성단을 돌아보는 코스였어요. 광복 후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몇 년 동안 강화문 화원에서 강화 역사에 관한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때 수강하던 한 분이 말씀해주셨는데요, 학생 때 강화로 수학여행을 왔었다고 합니다. 배 타고 초지진에 내려 걸어서 삼랑성에 갔다가 또 걸어서 참성단까지 가셨데요.


전국에, 고조선 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적지 않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옛 역사책에 기록으로 남은, 그러니까 일종의 정통성을 확보한 유적은 강화의 참성단과 삼랑성뿐입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고려사》입니다. “마리산 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삼랑성을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고려사》 말고 또 있나? 예, 또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도 《고려사》와 비슷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비록 “세상에 전하기를[世傳]”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참성단과 삼랑성의 역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몹시 소중한 내용입니다.


▲ 참성단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에서 성화 채화를 시작한 때가 1955년 제36회 대회입니다. 장소는 당연히 마리산 참성단이죠. 그런데 1990년 제71회 전국체육대회 때 성화 채화 장소가 논란이 됐습니다. 대회 장소인 충청북도가 성화 채화를 강원도 태백산에서 하게 해달라고 체육부와 대한체육회에 요구했던 겁니다. 강원도 태백시는 “성화채화지 변경을 시민운동의 일환으로까지 전개”했습니다. 태백산도 ‘민족의 영산’이니, 태백시의 바람도 일리가 있습니다.


연일 갑론을박, 대한체육회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학문적 고증을 의뢰했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단군성조와 관련된 성지인 백두산 구월산 묘향산 마니산 가운데 남한지역에서는 마니산이 유일하고 현실적인 성역”(한겨레신문, 1990.06.30.)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성화 채화를 태백산이 아닌, 마리산 참성단에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산에 참성단을 쌓은 것은 언제인가?

모르겠습니다. 고조선시대에 쌓았을 수 있겠고, 그 이후에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도 《고려사》에도 《조선왕조실록》에도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없습니다. 《한단고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환단고기》라고도 하는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무오 51년(B.C. 2283), 임금께서 운사 배달신에게 명하여 혈구에 삼랑성을 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이 바로 그것이다.”


기원전 2283년에 단군이 참성단을 쌓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학계는 《한단고기》를 위서(僞書, 가짜로 꾸며서 쓴 책)로 봅니다. 물론 위서가 아니고 진짜 역사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귀가 얇아서 이쪽 말을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으면 또 그게 맞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학계의 공론을 따라 《한단고기》 기록은 취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참성단을 쌓은 게 언제인지 모른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성단이 기록으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고려시대입니다. 1264년(원종 5)에 고려 임금 원종이 참성단에 서 하늘에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옵니다.


참성단을 진짜 고조선 때 쌓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오랜 세월 참성단이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어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세계화, 다문화 시대인 지금 ‘민족’이나 ‘한민족’이라는 용어가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학계에서도 회피하는 용어가 됐습니다. 그래도 우리 역사를 구조화해서 이해하는 데 여전히 필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합뉴스에 ‘일제시대 바뀐 우리 산 이름 되돌린다’(2005.10.08.)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해당 기사에서 마리산도 일제강점기에 마니산으로바뀌었다고썼습니다.하기는저도고등학교다닐때어떤선생님께 그렇게 들었습니다. “원래 마리산이었다. 마리산의 ‘마리’는 머리를 가리킨다. 으뜸이라는 의미인데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꺾으려고 마니산으로 바꿨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그랬지요. ‘나쁜 새X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구석구석 나쁜 짓 참으로 많이 했지만, 그들이 마리산을 마니산으로 바꾼 것은 아닙니다.


▲ 마리산

옛날, 사람들은 마리산으로 불렀습니다. 머리산이나 그 비슷한 의미로도 불렀을 거예요.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摩利山입니다. 고려시대까지 마리산(摩利山)으로 쓰고 불렀는데 조선시대 역사책에 슬그머니 摩尼山(마니산)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마니산과 마리산이 혼용되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면 마리산이라는 표현이 거의 사라지고 마니산으로 이름이 굳어집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마니산’을 공식 지명으로 씁니다. 국어사전에 ‘마리산’은 나오지 않아요. 맞춤법상으로 따지면, 마리산은 틀린 표현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강화 주민들 대개가 여전히 마리산이라고 발음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듣고 불러왔기 때문에 마‘니’산이 어색한 겁니다.


그렇다면 역사책에 摩尼山으로만 나오게 되는 조선후기부터 사람들은 마리산을 “마니산”으로 발음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摩尼山이라고 쓰기는 해도 여전히 마리산으로 읽고 불렀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摩利山도 마리산으로 읽고 摩尼山도 마리산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摩尼’는 머리를 뜻하는 ‘頭(두)’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摩尼’가 ‘頭’라면, 결국 ‘摩尼’와 ‘摩利’는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제작한 강화 지도를 보면 摩尼山이라고 쓰고 가타카나로 발음을 병기했습니다. “マリサン” 마리산입니다. 마니산이 아닙니다. 아마도 지역 주민들이 마리산으로 발음하는 걸 듣고 그렇게 적었을 것입니다. ‘마리산’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겁니다.


1995년에 강화군과 인천시가 함께 마니산 명칭 변경을 추진했습니다. 마니산이라는 공식 지명을 마리산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찍부터 마리산 이름을 되찾으려고 애쓰던 이들의 노력 결과입니다. 그러나 중앙지명위원회(지금 국가지명위원회)의 거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동아일보(1995.12.21.)가 중앙지명위원회의 거부 사유를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마니산은 전국적 또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지명이므로 인천시의 결정만으로는 처리할 문제가 아니며 또 하천 산 등 지명변경은 대학 또는 연구소의 학술조사 및 여론조사를 거쳐 타당성을 검토한 후 결정될 사안이라고 밝혔다.”

중앙지명위원회의 결정 수개월 전에 조선일보(1995.07.28.)는 “강화도 마니산의 이름이 마리산으로 바뀐다.”고 보도하고, 한겨레신문(1995.07.28.)은 “마니산 ‘마리산’ 된다”로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신문사들도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바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입 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한편, 2016년에 화도면에서 ‘마리산 이름 되찾기 강화군민대회’가 열렸습니다.(경인일보, 2016.07.11.) ‘마니산’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성으로 보아 ‘마리산’이 더 적합한 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마니산’은 ‘마리산’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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