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春榜(입춘방)

고 수 진(강화향교 장의)

미술관 창볕
茶香滿堂(다향만당) 찻잔이

옹기종기


바투 와

봄은,
더 바투


연탄난로 손등을 녹여 팔각처마

고드름 풀려야 창밖 목련가지


墨香묵향이

흥건히 터져

설 명절이 끝나자 곧 立春입춘입니다. 하지만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은 닥쳤지만 여전히 겨울의 小寒소한 · 大寒대한 추위에 못 지 않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올해 추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겨울의 특징인 三寒四溫삼한사온을 무색케 했습니다. 더군다나 설 명절 아침에는 하얗게 눈이 덮혀 깊은 겨울을 연상케 했습니다.

‘설날’은 ‘愼日신일’에서 淵源연원한다는 데요, ‘삼가 하는 날’ 즉 ‘(몸을)사리다’의 ‘살‘에서 유래했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빔을 곱게 단장하고 새날을 맞이하는 날이니, 輕擧妄動경거망동할 수 없는 날이고, 함부로 나댈 수도 없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民家민가나 宮中궁중에서는 섣달그믐에는 儺禮儀式나례의식을 행했다 합니다. 일종의 푸닥거리입니다만 묵은 잡귀를 몰아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묵은 잡귀를 몰아내고 새날을 맞이하는 것이니 더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경건하게 마치 1년 만에 맞이하는 큰 손님, 또는 집안의 어른들을 뵙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께서는 “한 살 더 먹은 게 참아야지, 한 살 더 먹었으니 점잖아져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한 살 더 먹는다. 떡국을 한 그릇의 의미는 그만큼 인간으로 성숙 되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마음이 연계되어 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봄은 곧 우리 농가에서는 농사를 준비하는 계기입니다. 農政농정은 나라님의 일이고, 농사는 농부 자신의 소임입니다. 소위 일 년 계획 중 봄에는 논, 밭갈이하고 씨 뿌리는 일을 살피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는 겁니다. 해서 우리 속담에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씨앗을 베개 삼는다”고 한 것입니다. 씨앗은 곧 한 농가의 1년 생계이지만 혹독한 겨울 추위로 여의치 못해 씨앗마저도 양식으로 삼았다면,,, 해서 孟子맹자의 말을 빌리자면,

“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춘성경이보부족, 추성염이조불급) 봄에는 논밭을 가는 것을 살펴 충분치 않은 것을 보조하며,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펴서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준다.” (『孟子맹자』 「梁惠王下양혜왕하 4 · 告子下고지하」 7)

이는 곧 나라님의 農政농정에 해당하는 일일 겁니다. 씨앗을 마련해서 파종케 해주고, 춘궁기의 굶주림 모면케 해주고, 거름이나 농기구에 지원해서 농사일에 걱정 없도록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맹자의 貴民輕君귀민경군에 입각한 民本思想입니다. 이른바 백성이 오직 귀하고 임금의 직을 가벼이 여긴다는 王道政治왕도장치의 根幹근간인 것입니다. 王道왕도란 봄날의 햇살 같은 임금님의 따뜻한 다스림을 얘기합니다.

‘春춘’ 자는 봄의 햇볕이 땅 밑으로 스며, 씨앗이 발아해서 땅위로 치솟는 새싹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즉 ‘날일 日’과 ‘싹철 屮’, ‘풀초 艸’, ‘풀훼 卉’의 會意회의 합체자입니다. 동지로부터 입춘까지 40여 일이 지났으니 낮 길이도 아마 3~40분은 길어졌을 겁니다. 새싹의 힘은 우리 사람이 20킬로그램을 부담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린 생명의 위대함에 자연 숙연해지는 순간입니다. 낮의 길이가 좀 더 길어지면 새싹을 무성해질 것이고, 꽃과 함께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立春입춘에 매년 쓰는 것이 ‘立春榜입춘방’입니다. 굳이 서예가, 서예인이 아닐지라도 잡히는 대로 필기구를 이용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대문에 양쪽으로 붙이는 문구가 바로 “立春大吉입춘대길 建陽多慶건양다경” 입춘이 되었으니 크게 吉할 것이요, 陽氣양기가 돋우니 좋은 일만 많을 지어라.” 꽁꽁 얼어버린 겨울 추위를 이겨냈으니 앞으로 고생 끝, 행복의 시작이 봄에서 모든 행로가 순탄하게 이어질 것이고, 햇볕의 도움을 받아 농부가 부지런히 쟁기질하고 씨 뿌리면, 결국엔 탄탄한 결실의 경사만이 남는다는 뜻이 될 겁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폐관이 됐지만 심은 미술관의 관장인 심은 전정우 선생님께서는 매년 이즈음에 입춘방을 써서, 미술관 현관이나 서실 입구에 붙여 봄의 향연을 즐겼습니다. 墨香묵향의 濃淡농담이 어찌나 흥건한지 단박에 물 풍선처럼 물컹 터져버려, 창밖의 목련가지, 꽃망울이 활짝 벙그러질 것 같았습니다. 며칠 후면 정월 대보름 오곡의 고봉밥 위에 떠오르는 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추억의 쥐불놀이,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雨水우수에 驚蟄경칩 곧 다가옵니다. 봄볕의 기운은 모든 생명을 소생시키는 무한한 에너지요, “農者天下之大本也농자천하지대본야”
春省춘성의 大作대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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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벽하 기자 다른기사보기